[기묘한 큐티]

[기묘한 큐티]요한복음 5장 19-29절 아들의 권한

요5 19-29요5 19-29 2요5 19-29 3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병행구조

  • * 19-23 아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24-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6,27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28-29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이상훈,『100주년주석 요한복음』, 198

스스로 없나니아들도 그와 같이

  • *종의 형체를 취하였어도 그는 사람들이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아버지의 일하심을 보고 알고 계시며, 그의 행동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행동이다. W. Frank Scott,『베이커주석 요한복음 상』, 287
  • *이것(19,20절)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유대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의 최초의 부분이다…세 가지 내용을 밝히신다. (i)그는 자기와 하나님은 동일(identity)하다고 주장하신다… (ii)이 동일성은 동등성에 근거해 있다기 보다 오히려 완전한 순종에 근거해 있다…(iii)이 순종은 완력으로 인한 복종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근거해 있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는 결합은 사랑의 결합인 것이다. 바클레이,『바클레이주석 요한복음 상』, 280,281
  • *시간적 선후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 부자의 중복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 행위를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4,185
  • *라이트푸트는 이 담론이 “그리스도교적 유일신론을 변호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예수는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고 완전히 의존할 때에만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는 아무런 독립적인 신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독립적인 의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심판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본 것만을 행한다. 이것은 겸손한 승인이면서 동시에 고귀한 주장이다…그러나…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자이면서(30절) 동시에 아들로서(23,37절) 하느님을 나타내며, 계시하는 자이다…이러한 도덕적인 관계에 대한 언어에 덧붙여서 요한은 신화의 언어도 역시 사용한다. 예수는 그 안에서 참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사람이다. C.K. 바레트 , 『국제성서주석 요한복음 1』, 416,417
  • *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의 일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사역들을 온전히 밝혀준다.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 이상의 그보다(20) 더욱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다…아들과 아버지의 하나됨은 너무 완벽하여서 하나님에 대한 공경 역시 예수께 연결된다. 하나님이신 아들을 배척하거나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배척, 불공경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에드윈 A. 블룸, 『두란노 강해 주석 요한복음』, 68
  • *여기서 “할 수 없다”는 것은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않고는’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곧 예수님은 모든 일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다 보시고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똑같이(호모이오스)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19절). 이로써 예수님은 자기와 아버지 사이의 동등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이어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신다”고 말씀하신다(20절).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임을 말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보이시고 행하게 하시는 근본 동인이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아가파오’가 아니라 ‘필레오’다…의미상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레오’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좀 더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4,135

보이시고

  •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을 통해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3:17, 11:27).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5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6
  • *심판에서 성부와 성자의 역할 관계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지만, 심판의 주관은 성부가 하시고 심판의 시행은 성자가 행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심판을 맡기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곧 공경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함을 말한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5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눅17:21; 고후5:17; 골3:3; 벧전1:23). 스밀데(E. 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 44).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7
  • *아버지는 유일하게 참된 생명의 원천이며, 의로운 심판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선사하는 일과 심판의 책임을 모두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두 가지는 부분적으로 그것들이…계시된 능력의 표징들이기 때문에 언급되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생명과 심판이 복음서 전체의 두 가지 중심 주제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생명과 심판은 그것들 자체로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특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브라운은 생명과 심판은 19-25절에서는 실현된 종말론으로 서술되었고, 26-30절에서는 마지막 때의 종말론으로 서술되었다고 구별하는데 이런 구별은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C.K. 바레트 , 『국제성서주석 요한복음 1』, 417
  • *“얻었다”는 동사가 현재시제이며, 25절의 선언인 “때가 오나니 지금이라”고 한 맥락적인 이해로 보아, “죽은 자”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요한신학의 진수인 실현된 종말이다. 믿는 자들은 이미 영적으로 종말의 세력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참조. 3:5; 11:26).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의 물을 마시는 자이고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떡을 먹은 자들이다. 이상훈,『100주년주석 요한복음』, 202
  • *이 구절(24절)은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생’에 대한 요절로 즐겨 암송되고 있다. /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이 구절은 ‘심판’에 초점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곧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에 초점이 있으며, 그 다른 측면이 곧 ‘영생을 가지는 것’이다. 먼저 ‘영생을 얻었고’의 원문을 직역하면 ‘영생을 가지고 있고’가 된다. 즉, 시상을 따지자면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현재’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우니는 ‘현재적 영생’이라 부르는데 요한복음에서 많이 말하고 있다(요3:36; 6:47, 54; 3:15, 16; 6:40 등). 현재적 의미의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인격적 관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요17:3)…’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미래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미래에 있을 최후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또는 심판을 받더라도 무죄 선언을 받고 영생으로 판결날 것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현재적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6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지금 현재’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믿음 결과로 현재 생명의 영역 안에 거하고 있음을 말한다(골1:13; 롬8:2).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7

죽은 자들

  •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예수는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노력하는 것을 중단해버린 상태다…(나)죽었다는 느낌을 중단해버린 상태다…죄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강열한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서서히 그들은 거기에 무디어졌다…(다)생각을 중단해버린 상태다. J. 알렉산더 핀들레이(Alexander Findlay)가 자기 친구의 말을 인용해서 “그대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는 그대가 죽어있다”고 했다. 그가 의미한 것은 사람의 정신이 폐쇄되어 버리면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체적으로는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죽은 것임을 말한다…(라)회개를 중단해 버린 상태다. 사람이 평안한 마음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날이 그의 영적 사망의 날이다. 바클레이,『바클레이주석 요한복음 상』, 287,288
  •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7

이때라 듣는 자는 살리라

  •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때라”고 하신 말씀(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7
  • *‘살리라’는 미래 시상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즉, 만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믿으면 그들은 살아나리라는 의미다. 따라서 ‘살리라’는 것은 조건 성취의 결과로 따르는 귀결적 의미에서의 미래며, 그러한 일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7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 *‘엔 헤아우토’는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고 생명의 원천이신 것과 같이 아들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아버지와 더불어 자족할 수 있는 생명의 샘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참여자가 아니라 자기 생명 자체인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로서, 그 안에 생명을 갖고 있는 그같은 아들을 낳으셨다”(레이놀즈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글에서). W. Frank Scott,『베이커주석 요한복음 상』, 287

생명을 주어

  •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를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이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요1:4).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8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 *(1)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빌2:7-10). (2)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곧,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3)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 것(Meyer). (4)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 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들은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Beyschlag, Neutest. Theol. 1, p.290). (6)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란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인자’란 말이 보통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의 성품만을 의미하였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절)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수 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pp.375-376). (8)슐라텔(Schlatter)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이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절), 인자(곧,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인자는, 속죄자(곧, 인간성으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151). /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88-190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신성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면 27절(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짐’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그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의미다(빌2:6-11; 참조. 히5:7-10).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비천하게 사셨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고 전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행17:31).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8

무덤 속에 있는 자가

  •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90
  • *요5:25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놓인 자리가 다르다. 24,25절의 자리는 실현된 종말론을 언급하는 자리이고, 28,29절의 자리는 역사끝의 종말을 언급하는 자리이다. ..불트만은 24,25절의 실현된 종말과 28,29절의 역사말의 종말과의 차이를 설명하여 원저자 이외의 편집자가 개입한 뚜렷한 증거라고 했고,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기 두 문절들은 완전한 병행구조이며 그러한 일사분란한 병행구조는 오로지 한 사람의 원저자의 기술이기 때문임을 고찰하면 불트만의 해석은 무너지고 만다(Peter F. Ellis, The Genius of John, 318). 이상훈,『100주년주석 요한복음』, 203
  • *미래에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우주적인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적인 부활은 단12:1-2에 명확히 가르쳐져 있다. 그외의 다른 구절들은 생명에로의 부활, 즉 “첫번째 부활”이 단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며(휴거된 교회와 환란날의 마지막 때에 임할 예수님의 재림시에 핍박받던 성도들), 심판받을 이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의 마지막에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요5:28,29는 본 복음서 안에서 명백하게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는 몇 안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에드윈 A. 블룸, 『두란노 강해 주석 요한복음』, 69
  • *이 날은 장차 올 것이며 아직 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곧 이때라”는 말이 여기에는 없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인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심판의 음성이다. 구원의 때는 지나가고 마지막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8,139

선한 일을 행한 / 악한 일을 행한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푸락산테스’니, 상습적으로 행한 것, 혹은 일생의 행습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13; 단12:2).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90
  • *부활이 있을 것과 한 개인의 사후에 일어나는 어떤 삶은 불가분리적으로 이생에서 행한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다음과 같은 널리 알려진 광고 말이 있다. 즉 “그대가 내일 어떠한 기분이겠느냐 하는 것은 오늘 그대가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려있다. 현재의 삶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오늘의 삶이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바클레이,『바클레이주석 요한복음 상』, 289
  •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라는 말은 선행에 의한 구원과 악행으로 인한 심판을 암시할 수도 있으나 요한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배제된다(참조. 3:17-21; 6:28,29)…구원은 그리스도에의 믿음에 의한 것이다. 심판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는 것에 기인한다(요3:36). 에드윈 A. 블룸, 『두란노 강해 주석 요한복음』, 69,70

생명의 부활 / 심판의 부활

  • *요한은 영원성에서 그것을 의미했다. 요한은 이생이 끝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를 위하여 더욱 충만하고 더욱 놀라운 삶이 전개되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사망이 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클레이,『바클레이주석 요한복음 상』, 283
  • *마치 사람이 행한 바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표현은 ‘의인’ 또는 ‘성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곧 성도들의 삶은 전체적으로 불신자들의 삶과 비교하여 볼 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삶은 ‘악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워 진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9
  • *생명의 부활이야말로 의미 있는 부활이다. 보통 부활이라고 할 때는 생명의 부활을 의미한다. 곧 불신자들의 육체도 다 살아나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심판받기 위한 부활에 불과하다. / 하지만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때의 부활은 죽었던 ‘육체’의 부활을 의미한다. 육체가 썩어 없어져도 하나님은 그 육체에 대한 정보를 다 가지고 계시니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티끌 가운데서도 일으키실 수 있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도 부활하게 하실 수 있다. / 그러면 그 죽은 자들의 영혼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먼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천국(낙원, 천당)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다(살전4:14 3:13). 그러면 죽은 불신자들의 영혼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음부(지옥)에서 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계20:13). 그래서 각각 천국과 지옥에서 온 영혼들이 땅 위에서 다시 살아난 육체들과 결합하는 것이 부활이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육체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며 살고, 악인들은 육체와 함께 지옥(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 그러므로 부활은 죄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영혼과 육체의 재결합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헤어지지 않을 영원한 결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이런 ‘극적 재결합(dramatic reunion)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두란노HOW주석 요한복음』, 139,140
  •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인 종말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거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박윤선,『성경주석 요한복음』,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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