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인간]

[기묘한 생각]네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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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용서를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편으로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나는 나 자신과 혼자가 아닙니다. I am not alone with myself” ‘나’ 속에 ‘하나의 나’가 아닌 ‘무수한 나’가 있다는 것을 다양한 사람들이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에게 의나의 물음이 되고 있다 I have become a question to myself 라고 했다. 바오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한다 I do what i don’t want to do, I don’t do what I want to do ‘라고 했다. 또한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란 “내가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 having a conversation with my self” 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나’의 외면성은 나의 선택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나’의 내면성은 ‘나’의 선택과 만들어감을 끊임없이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무수한 잠재적 ‘나’ 또는 실재적 ‘나’들 중에서 나는 어떠한 ‘나’를 선택하고 만들어갈 것인가는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삶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30,31

[네 성격]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네 성격에 그런 일은 절대 못해“ 이 같은 말에는 변동불가한 하나의 성격이 전제되어 있다. 과연 성격은 돌처럼 딱딱하게 정해져 있을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점점 더 괴상해지는 성격분석 때문이다. 처음엔 ”에이형이라서 그래”, “비형 같은 에이형이라서 그래” “외향적이라서 그래” 한다. 하지만 좀 안맞다 싶으면 나중에는 ”비형이 되고 싶은 에이형이라 그래”, “에이형같은 비형이네” “외향적이고 싶지만 내성적이라 그래” 같은 온갖 분석을 내놓는다. “무슨 유형에 무슨 날개”, ”무슨 외형이지만 실상은 어떤 유형“ 같은 모든 분석은 마치 무당처럼 군다. 끼워맞추다보면 맞춰진다. 돌도 마구 던지다 보면 누군가는 맞는 것처럼.

성격불변설(?)은 정중히 사양해야겠다. 원래 그런 사람이길 거부한다면, 원래 그런 사람이란 없지 않을까. 성격론도 운명론도 믿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일 아닐까. 나는 마네킹이 아니다. 차라리 이리뛰고 저리뛰는 개구리다. 마구 던지는 돌에 스스로 몸을 던지지 않을란다. 던질라치면 저 멀리 달아나버릴란다.

한편으론 성격탓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속에 다른 어떤 것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행동했다고 괴상하게 굴지는 말아야겠다. 분을 못참고 온갖 욕설을 토해놓고는 성격탓하거나, 용기없어 말 못하는 것을 성격탓 하지는 말아야 겠다. 내남이 아는 것처럼 비겁한 도피행각으로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때리고 술탓하는 못난이가 될 바엔, 차라리 잘못했다고 고개 숙이는 못난이가 되어야겠다. 분노하고 비겁했던 건 내 성격이 한 일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다. 달리 누가 있으랴.

이렇게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 그 무당 용하기도 하다. 내가 이런 괴상한 글을 쓰는 것도 B형 남자라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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