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티]

[기묘한 큐티]요한복음 3장 31-36절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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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만물 위에

  •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하느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더구나 강조적으로 “만물 위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이것은 고린토전서 15장 27,28절에서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종속절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매우 역설적으로 후대의 두 본성교리를 예기하여서 이스라엘에 속한 지상의 메시야에게 이런 칭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용납할 수 없다. – 에른트스 케제만,『국제성서주석 로마서』, 423
  • *아리우스주의: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의 가르침에서 성부-성자의 관계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과 만물의 첫째로서, 그 후에 만물이 지음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러한 관계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있지만 모든 면에서 성부와 동일하지 않다고 보았다. 『차트 고대와 중세 교회사』, 92

증언

  •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친 일부의 사람들(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사도적 신앙과 실천에 대한 지속적인 공동체적 증언에 호소하였다. 이 공동체적 증언은 일관성, 연속성, 공동의 신앙의 보증이라는 진리 기준의 빛 안에서 공적이며 또한 검증 가능한 것으로서, 성서해석의 준거 틀이 되었다. 특히 이레네우스는 구약성서를 거부하는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신약성서를 이용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대응하여, 한편으로는 신구약성서의 통일성과 전제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맥락으로서의 사도적 증언과 공적인 사도적 전통의 역할을 재확증하였다. – 윤철호,『신뢰와 의혹』, 30

인쳤느니라

  • *…헬레니즘 세계에서 ‘인치다’라는 말의 용법에 대해서 풍부한 증거들을 인용하고 있다. 찍혀진 채로 그대로 있는 봉인은 서류가 변조되지 않았다거나 혹은 수송 중에 물건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동시에 소유권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침을 당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의 소유물로 눈에 보이게 표시되고, 심판의 날에 심문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 찰스 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토후서』, 115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 그의 권능의 단 한 가지 실례를 알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 성령의 동일한 역사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성령을 주신 목적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죽을 것을 살리시고자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참고. 롬8:11)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최종판 중권』, 605
  • *하느님은 당신 성령을 유다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선물로 주신다. 성령계서는 인류의 희망을 이끌어 가시는 주된 힘이시다. 인류가 하나 되어 온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도록 길을 인도하는 분이시다. – 『21세기 성경해설』, 2072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 *‘믿는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98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공관복음(막11번, 마14번, 눅9번)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하다. 이 단어는 앞에서 언급한 요한복음의 저술목적(20:31)에서도 나타날 뿐 아니라 서두의 중심이 되는 요한복음1:12과 3:16-18에도 나온다. 그리고 이 단어는 다양한 표적들과 그에 따른 강론들의 중심 된 논쟁이기도 하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 즉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눈다. 요한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받는 사람들로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확실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적 이슈로 제시된다. – 『두란노 HOW주석 요한복음』, 11-12
  • *요한복음에서 구원의 실재를 의미하는 생명은 ‘조에’로서, 이것은 일시적인 생물학적 생명인 ‘비오스’와 대조되는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의미한다. – 『21세기 한국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신학』, 298
  • *1세기 유대인들에게 ‘영생’이란 유대인의 시대 구분에서 볼 때 장차 올 시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현시대는 어둠이고 죽음이 지배하는 시대다. 그러나 장차 도래할 시대는 낮(빛)이며 생명으로 가득한 시대다. 따라서 ‘오는 세상’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의미한다. – 『Simply Gospel』,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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