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계시]

[기묘한 계시] 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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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천지창조’의 아담의 손(좌)과 하나님의 손(우). 손가락모양의 미묘한 차이.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물론 기생체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선택이 숙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주는 자기 몸 안으로 기생체가 들어올 때는 물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숙주는 기생체가 욕망하고 주문하는 것을 욕망하고 주문한다. 자기 욕망이고 자기 주문인 것처럼 욕망하고 주문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에는 하지 않거나 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을 사랑의 숙주가 된 다음에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7

결혼, 그 커다란 약속 앞에서 나는 잠 못 이루곤 했다. 결혼 후에도 한참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아이 둘 낳고, 하나는 입양에서 키우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은 어딘가로 쏙 들어가 버렸다. 기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딸 하나 맞이하는 일에도 벌벌 떨었다. 자식맞이란 결혼보다 더 거대한 일이었다.

사랑의 언약은 나를 바꿨다. 아내가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요, 아이가 배부른 일이 내가 배부른 일이다. 이들 때문에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사랑의 언약을 살기 시작한 이상, 사랑이 내 안에 살기 시작한 이상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하다.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광이 변하듯, 능동적인 것들이 수동적인 것들로 바뀐다.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므로, 기생체 같다는 말이 딱 맞다.

계시(Revelation)란 라틴어‘Revelum’에서 나온 말이다. re와 velum 의 합성어이다. ‘Re’는‘다시’, ‘제거하다’, ‘Velum’은‘휘장’이란 의미이므로 ‘Revelum’은 ‘휘장을 제거하다’란 원초적 의미를 가진다. 이 ‘계시’란 베일이 벗겨지는 일이다. 베일을 ‘벗겨서 보는’ 사건이 아니라, ‘베일이 벗겨지는’ 수동적 사건이다. 이는 자의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의반 타의반도 아니다. 오로지 타의에 의한 일이다.

사랑은 누가 하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고자 하여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 나로 하여금 어떤이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일까. 마찬가지다. 내가 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신이 나를 사랑하고 나로 하여금 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일까. 인간적 사랑에도 취약한 우리는 신적 사랑에는 더더욱이나 무력하다. 그렇게 신은 우리를 만나고, 우리는 그 사건을 계시라고 부른다. 마치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갓 잉태된 내 아이가 부모를 만나는 것처럼, 부모가 아이를 만나고 우리는 신을 만난다. 능동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수동적인 일이며, 능동적인 일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오늘도 나는 내 사람들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아침을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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