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상

도화지

널따란 도화지가 반으로 접힌다. 처음 받을 때야 너무도 새하얘서 도무지 무얼 쓸지 또 무엇으로 써야할 지 감을 잡지 못했다. 매번 그렇듯, 그저 귀퉁이마다 그적이며 살았을 뿐인데. 벌써 여섯 달이란 시간이 흘러 이제는 다시 쓸 수 없을만큼 때가 타고, 꼬깃꼬깃하다.

괜시리 접혀진 면을 들추어본다. 그곳엔 무언가를 향햔 얼큰한 속내가 쓰여 있고, 저 윗층 영감님을 향한 볼멘 그림도 그려져 있고, 더러는 누군가를 향한 설익은 사랑도 칠해져 있구나. 그 열없던 시간들을 재차 덮으며 반쪽짜리 허허로운 도화지 앞에 서서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걸 두려워 하는가.

누구와 즐거워 하는가. 따위의.

짐짓 숙연한 마음마저 드는 이슥한 밤에. 매번 허공에 던지는 답없는 물음들 앞에서.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는 가시 돋힌 자책을 내려놓고. 다시 적어본다. 그동안 행복했냐고. 앞으로 무얼하고 싶냐고. 이제 절반 밖에 남지 않은 도화지 한쪽 귀퉁이에 조심스레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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