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교의학 4장 신앙에 관하여 

A. 예비고찰

 

‘신앙’은 성서 전반에 걸처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때로는 끈기로, 때로는 신뢰로, 또 때로는 인정, 확신, 통찰 등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런 양태의 다양성은 ‘과연 신앙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에 관해 많은 논쟁을 낳았다.

신앙과 관련된 가장 뿌리 깊은 논쟁은 계시와 이성 사이에, 다시 말해서 전적인 신뢰와 이성적 인식 사이에 놓여 있다. 과연 신앙은 전적인 신뢰인가? 아니면 이성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인가?

고대의 변증가들은 주로 양극단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유스틴,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포괄적 입장 아래 신앙에 관한 철학적(이성적) 작업을 적극 지지한 반면, 테르툴리안은 이를 부정하고,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며 철학을 적대시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일언을 들어보자.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121_테르툴리안)

중세시대에는 ‘신뢰’를 강조하던 신앙 이해가 점차 교회의 권위를 수용하는 ‘인정’의 신앙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아퀴나스는 신앙을 함축적인 것과 명시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조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122)

종교개혁자들은 인격적인 신뢰를 강조했다. 대교리문답에서는 신앙과 신뢰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협정신조에서도 신앙은 심사숙고한 신뢰로 정의되었다.(123) 다만 이성이 전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분명한 한계선 안에서 이성은 제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정통주의는 신앙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124)

첫째, 인식 =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

둘째, 인정 = 하나님을 믿는 것.

셋째, 신뢰 =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정통주의에 따르면, 제대로 된 신앙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식 없이는 그 무엇을 인정할 수 없고, 또 인정 없이는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신뢰)은 순종(인정)을 전제하고, 순종은 경청(인식)을 전제한다.”(125)

정통주의는 이중에서도 ‘인식’의 단계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신앙 행위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그저 인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통주의는 점차적으로 신앙의 객관성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이런 정통주의에 반하여 신앙의 주관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나아가 관념주의 신학은 신앙을 자주 특별한 신앙과 주관적 신앙으로 이해했고, 종종 감정이나 내면성의 영역으로 축소했다.

 

덧.

헤겔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을 배격하고 종교와 철학,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종합했다. (127) 이와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신앙과 사고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신앙은 ‘교리의 총체’가 아니라 하나의 ‘역설’이었다.

 

B. 오늘날의 논쟁

 

변증법적 신학이 출현한 이래 신앙과 관련된 오늘날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로 압축해볼 수 있다.

 

1. 신뢰인가 통찰인가? 주관적 신앙과 객관적 신앙의 문제. 

 

신앙을 신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통찰로 볼 것인가. 이에 관하여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답변을 내놓았다.

 

“초기 바르트가 신앙을 불합리한 곳으로 뛰어드는 일종의 열광적 도약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면, 후기 바르트는 신앙을 ‘인정’ – ‘인식’ – ‘고백’으로, 곧 일종의 ‘지식’으로, ‘인지 사건’으로 이해했다.”(129)

 

“불트만은 권위에 의존하는 신앙만이 아니라 증명에 근거한 신앙도 반대했다. 그는 주관적 신앙, 모험과 신뢰의 신앙을 강조했다.”(129)

 

“에벨링은 불트만처럼 맹목적 신앙을 거부했다. (중략) ‘신앙은 바로 이성을 정직하고 학문적으로 이용하기를 요구하며, 현실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신앙은 미신과 환상의 가장 강력한 적이다.’”(130)

 

또 판넨베르크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신앙은 근거가 있는 모험이다. ‘완전히 맹목저긍로 믿는 사람’이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 앞에서 자신의 신앙에 관해 해명하는 사람이 가장 잘 믿는 사람이다.”(132)

 

바이쉐델은 판넨베르크보다 더 분명하게 주장한다.

 

“나는 맹목적으로 믿는 자가 아니라 보면서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며, 인식하기도 전에 믿는 자가 아니라 인식한 다음에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132)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학자들의 의견처럼 신뢰와 통찰은 서로 대립되지만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신뢰와 통찰은 하나의 신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뢰와 통찰의 관계는 폰 라트가 말하는 성서의 ‘지혜’ 개념을 통해 서로 중재될 수 있다.

 

“지혜는 실천적인 일상적 경험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지혜는 지식임과 동시에 신앙이다. 지혜는 지식을 통과한 신앙이요, 신앙을 통과한 지식이다. 지혜는 아는 신앙이요, 믿는 지식이다.”(135)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주관적 신앙임과 동시에 객관적 신앙이요, 우리가 의지해야 할 버팀목임과 동시에 우리가 믿는 내용이요, 신뢰임과 동시에 통찰이요, 당신에 대한 신앙임과 동시에 사실에 대한 신앙이요, 신뢰임과 동시에 지식이다.”(128)

 

2. 신앙과 사고

 

신앙과 이성 역시 마찬가지다. 맹목적 신앙을 조장하는 비합리주의도 문제이지만, 객관적 사고만을 주장하는 합리주의도 문제이다. 이러한 양극단, 곧 사고하지 않는 신앙과 신앙하지 않는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는 보다 더 바른 신앙 이해를 가져야 한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공통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이 토대 위에서 신앙은 이성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이성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오직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신앙의 본질로부터, 곧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위기와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으며, 이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오류가 없지 않다.”(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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