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3장 성서에 관하여 – 교의학 (H. G. 푈만)

A. 예비고찰

처음부터 고대교회에 ‘신약’성서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1)모세의 율법과 권위있는 문서들, 2)하나님 말씀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3)그리고 그 예수의 증인들(사도들)이 현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와 그 증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점차적으로 상황은 변해갔다. 즉, 그들의 가르침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이런 상황 아래서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된 것이지 결코 완결된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특히 고대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이단사설들은 교회의 신학적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신약성서를 확정짓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이 문서들을 하나의 정경으로, 곧 다른 모든 후기의 전승을 판단하는 하나의 ‘잣대’로 집성할 수밖에 없었다. 200년경에 신약성서의 정경은 최소한 21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그리고 4세기 후반에는 오늘날처럼 27권의 분량을 가진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86)

이로써 성서는 (예수로부터 부여된 권위를 가진)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또한 그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교회의 전통들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만 이 사도적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대해서는 교회사적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은 (신구약) 성서를 교회의 형식 원리로 대단히 강조했다. 그들에게 성서란 교회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일차적 근거이자, “유일한 여왕”(87)이다. 성서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서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정당성을 검증하는 시금석은 바로 그리스도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특별히 믿을 만하고 분명하며, 자기 자신의 해석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전통을 통해 신뢰를 얻고 설명되고 해석될 필요가 없다.”(87)

정통주의 역시 종교 개혁자들의 유산을 자신의 기본적인 전제로 삼는다. 정통주의 성서론의 기본 명제는 다음과 같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88)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서 기자들이 신으로부터 기계적으로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기계적 영감론은 말씀이 ‘육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신약성서의 관심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개신교주의는 정통주의와는 반대로 성서를 인간 중심적으로 이해했다. 즉,

“성서는 인간의 다른 책들과 똑같이 읽혀지고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의 책으로 재인식되었다.”(92)

이런 성서의 ‘탈신성화’는 성서의 권위를 축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신앙을 강조한다. 성서를 읽는 개인의 입장, 경험, 신앙 등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독자의 신앙 안에서만 성서는 성서가 될 수 있다.

B. 오늘날의 논쟁

신개신교주의의 인간 중심적 성서 이해와는 반대로 변증법적 신학은 다시금 정통주의의 유산을 일부 받아들였다.

“현대 개신교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의 전환 이래 일반적으로 구개신교주의의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 이해를 다시 수용하지만, 그 성서론을 모방하지는 않는다.”(94)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볼 수 있다.

1.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바르트는 성서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단언한다. 그러나 성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즉, ‘성서=하나님의 말씀’은 성립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성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바르트의 신학이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는 것처럼, 그의 하나님 말씀 이해 역시 삼중적인 구조를 보인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드러난다.(95)

첫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셋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킨더, 외스트 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 이해를 제시한다. 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동일시 하지 않으며 다만 그 일부로 보았다. 특히 케제만은 성서의 형식적 권위를 날카롭게 거부하며, 복음적인 틀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보다 크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단순히 똑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비록 증거와 증거된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96)

물론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한다. 왜냐하면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성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또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 역시 해석이라는 위험성과 한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성서는 통일성이 있는가?

성서는 2,000년 이상의 역사와 수많은 저자들을 통해 구전, 기록, 편집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집합체이다. 따라서 성서 안에서 ‘형식적’ 통일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성서의 형식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라는 ‘내용적’ 관점에서 보면 성서의 통일성을 주장할 충분한 여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의 ‘전체적 의미’다. 바로 이로부터, 그리고 바로 이를 지향하는 가운데서 성서는 읽혀져야 한다.”(99)

3. 구약성서의 권위

일찍부터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다양한 입장이 있어왔다. ‘우화적 관계’, ‘약속과 성취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 ‘준비와 완성의 관계’ 등 다양한 설명들이 가능하지만, 그 모두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구약과 신약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 즉, 동일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데서 분명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복음 안에서 철저히 불연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나란히 놓고 동등하게 보며 오직 두 문서의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주석가들은 구약성서 안에서 즐거이 그리스도를 읽기 때문에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동어반복처럼 보인다. 그들은 신약성서가 결코 구약성서의 반복이 아니라 참으로 새로운 것,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보복을 바라는시편들, 거룩한 전쟁, 제사법, 형법)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능가한다.”(102-103)

4. ‘오직 성서만으로’의 원리 또는 성서, 전통과 신앙고백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서’를 주장한 반면, 가톨릭 교회는 성서와 전통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신앙규범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물론 성서도 ‘사도적 전통’ 아래서 형성된 산물이기에 따지고 보면 전통적이다. 다만 고대교회가 성서를 규정하는 순간부터, 성서는 그 이후의 이차적 전통들을 가늠할 수 있는 ‘본래적 전통’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성서가 전통 이전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서는 전통 속에서 전통의 원래적 증언으로서 파수꾼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105_스키츠고르)

물론 이차적 전통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차적 전통은 자신의 원천인 본래적 전통과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적 전통으로서 성서와 교회의 이차적 전통은 적절한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모든 전통을 폐기하려는 ‘성서주의’ 역시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5. 정경의 문제

성서를 정경화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통해서이다. 먼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사도적이어야 한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증거들이 있을 때, 성경은 교회의 작위적 산물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서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한다.”(109)

“정경을 성취한 것은 교회가 아니다. 정경은 자신을 스스로 성취했다.”(109_디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정경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을 검증하고, 정돈한다.

“정경 확정은 2세기 교회와 20세기 교회의 신앙 행위다. 20세기 교회는 2세기 교회의 정경 결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2세기 교회처럼 교회의 신앙에게 바로 이 정경을 정경으로 믿게 한 성령의 정경 결정을 믿는다.”(110)

물론 오늘날 교회는 2세기 교회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정경을 믿는다. 따라서 정경의 범위를 새롭게 결정할 권리도 있다. 이를 가리켜 브루너는 정경이 “어두운 테두리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반면 오트는 이 문제를 거부하며 정경의 현제 모습을 고수하기를 원한다.

6. 성서비평의 정당성과 한계성

성서비평이 어느정도까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정경의 범위와 동등하게 선을 그어 비평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며, 다른 누군가는 너무 성서의 중심에 선을 그어 모든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한계선을 성서의 중심에 얼마나 가깝게, 그리고 얼마나 멀리 그어야 하는지는 보편타당하게, 그리고 학문적 연구의 차원에서 결정할 수 없다.”(114)

“성서의 부분적인 관점을 전부인 것처럼 과장하고 성서의 중심을 무시하는 비평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지만, 성서의 중심에 거의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하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근본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114)

성서비평의 적절한 한계와 수위는 결국 비평자의 신학과 신앙에 달린 것이다. 다만 성서 안에서 결코 비평될 수 없는 것, 도리어 모든 것을 비평하는 근거가 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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