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애송이 전도사와 청년 K의 대화 2편

청년은 약속한 대로 일주일 후에 애송이 전도사를 다시 만났다. 사실은 더 일찍 만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지 않겠다고, 그의 주장이 궤변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큼 강력한 허점을 찾겠다고 의지를 다지면서, 인터넷 자료를 뒤지면서 일주일을 참았다.

청년 K 전도사님, 그날 이후 머리를 식히고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자료도 찾아보았어요. 딱히 거부할 만한 것은 찾지 못했으나, 아직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어요.

전도사 과연 그래요.

청년 K 다시 질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신은 분명히 있습니까? 어떻게 알지요?

전도사 성경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누구인지 밝히는 내용이 나와요. 출애굽기 3:14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라고 말 이예요. 이걸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저도 공부 좀 했나 봐요. 하하.

청년 K 그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처음 듣는 내용 같은데 무슨 뜻이지요?

전도사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죠.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는 내용이에요.

청년 K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밝힌 내용이잖아요.

전도사 대박이네요. 맞아요. 좀 더 직역하자면 ‘나는 있다’ 또는 ‘나는 나로 있다’라고 할 수 있어요. 저번에 이야기했던 존재물과 존재에 대해 기억나시죠? 하나님은 존재물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라고 밝힌 거예요. 철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존재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청년 K 네네. 또 철학인가요? 흐흐

전도사 많은 구약학자들에 의하면 야훼(여호와)도 그런 뜻이래요.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핵심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의인화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존재물’로 오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에요.

청년 K 네. 알겠어요. 대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때까지 잘 들어볼게요.

전도사 뛰어넘기 어려운 벽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해요. 우리는 분명한 것,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을 원해요. 그렇지 않은 것들은 말하기도 믿기도 어렵기 때문이에요. 존재보다는 존재물에 집착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유명한 이야기 있잖아요.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 그처럼 우리는 꼭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고 싶은 거예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하기 쉽기 때문이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하지요. 게다가 이것은 도무지 피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죄성’이라고 하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저도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싶어요.

청년 K 맞아요. 제 질문은 도마의 질문 같아요.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이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 거죠? 정말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고 싶어요. 이것이 죄라고 하니 교회 다니는 것이 힘든 거예요.

전도사 네. 동감입니다. 그래서 전 왜 우리가 원하는 데로 확인되지 않는 것인지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존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허허.

청년 K 허허.

전도사 이것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수록 결론이 분명해지므로 어쩔 수가 없어요. 사실 그 정도로 존재물인 우리는 존재인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이죠. 먼 길을 갈 수 밖에 없어요.

청년 K 그렇긴 하네요.

전도사 존재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플라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들어보면 알아요. 플라톤의 세계관은 이래요. 세상의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있고, 이 들어있음을 통해 개개 사물들은 그것들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지요. 책상이 책상인 것은 책상 안에 책상의 이데아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이데아론’이라고 해요. 게다가 온전하지 않고 아니라 부분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에 ‘분여이론’이라고 하지요. 철학적 용어는 빨리 넘어가도록 해요. 세상의 모든 빨간 사물들에는 빨강의 이데아가 들어있어서 빨간색이지만, 부분적으로 들어있어서 일시적으로 빨갛다가 퇴색되는 거지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더 오랫동안 빨간 것도 있고, 금세 색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단계를 상정하게 됩니다. 빨강의 이데아를 더 가지고 있는 것, 덜 가
지고 있는 것으로 말이죠. 플라톤에 따르면 원빈은 저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청년 K 마지막 말에는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하하

전도사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로 이해됩니다. 단계가 있기 때문이죠. 플라톤 ‘선분의 비유’, 플로티노스 ‘피라미드식 계층구조’,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의 사다리’,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존재의 계층구조’가 모두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거지요. 굳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겠습니다. ‘존재’인 신은 모든 가치의 정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이들은 모두 신을 존재 자체, 진리 자체, 선 자체, 아름다움 자체라고 표현해요. 신이 아닌 만물은 단계에 따라 이데아를 부분적으로 가진, 그래서 결핍된 존재물이죠.

청년 K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철학 시간에 들었던 내용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네요. 근데 전도사님, 아직도 멀었어요? 슬슬 힘들어요.

전도사 네. 속도를 올려볼게요.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플라톤의 이데아, 플로티노스의 정신, 아우구스티누스의 로고스, 이름은 다르지만 쉽게 말해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결국 불변성을 본성으로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즉 히브리인들은 달랐어요. 히브리인들의 존재는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지요. 자세한 것은 생략해도 될 것 같아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들과 관계하고 일하잖아요. 성경에서보면 하나님은 부동자이기는 커녕 변화가 본성처럼 보이죠. 여기가 중요한 충돌지점이에요.

청년 K 신에 대해서 한쪽에서는 영원불변을, 다른 쪽에서는 역동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거네요. 신이 분명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요. 역시 그저 상대적인 것일 뿐 유일한 진리는 없는 거죠?

전도사 성급하면 안 돼요.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은 통과하기만 하면 더없이 훌륭한 길이 될 수 있어요. 도대체 ‘존재’라는 신은 불변해야 할 텐데, 부단히 일을 하는 역동적인 하나님일 수 있을까. 오늘의 핵심은 이 부분입니다. 예컨대 ‘정직함’이라는 인격은 그것이 정직함이기 위해서 부단히 정직해야 합니다. 만약 정직하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을 한다면 그때부터는 정직한 것이 아니죠. 빨강은 끊임없이 빨간색이어야 빨강입니다. 색이 바랜다면 더는 빨강이 아닌 거지요. 세상 만물 무엇이든 끊임없이 본인다울 때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희망봉입니다. 불변과 변화, 존재와 생성이 서로 충돌하는 모순적 개념 쌍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함을 통해 불변할 수 있고, 끊임없이 생성 작용함을 통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청년 K 어려워요. 어려워요.

전도사 좋은 예가 있어요. 흠… 카메라 많이 찍지요?

청년 K 네. 휴대전화나 DSLR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습니다.

전도사 그러면 잘 알겠네요. 카메라 앵글의 노출 시간을 길게 해서 촬영한 사진 있잖아요. 도시 야경을 이렇게 찍으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죠. 도로 위로 빼곡한 차량이 아니라 후미등 불빛이 길게 이어진 붉은 선으로 가득찬 도시를 볼 수 있죠. 철학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변화하는 것들을 시간 밖에서 정지한 대상으로 보여주는 거잖아요. 플라톤이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그리스인들이 마치 이런 거죠. 노출 시간을 길게 늘여 시간 밖에서 존재와 존재물을 개념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고, 히브리인들은 신과 인간과 세계를 시간 안에서 실존적이고 현실적으로 파악했던 것이죠. 말하는 위치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우리들이 지금 한 테이블의 양편에 앉아 있잖아요. 앞에 머그잔 하나가 있고 제가 보기엔 머그잔의 손잡이가 오른쪽에 있어요. 어느 쪽에 있나요?

청년 K 왼쪽에 있어요.

전도사 네. 이렇게 같은 것도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은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표현이 다른 모든 것이 위치의 차이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존재에 대한 불변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이라고 해명할 수 있다는 거죠.

청년 K 네네. 알겠어요. 그래서 시간 밖의 신은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일하는 하나님이라는 거죠? ‘존재’인 신은 성경의 ‘창조주’ 라는 거죠?

전도사 우왕. 맞아요. 그래서 존재는 창조주이며 창조주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0) 라고 사도 바울이 가르치기도 했던 것처럼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헤헤.

청년 K 엥? 오늘도 이렇게 끝나요?

전도사 다음엔 정말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ㅋㅋㅋ

청년 K 왠지 속는 느낌입니다만 한번은 더 믿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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