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상

너무 당연한 이야기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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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기술할 뿐, 죽음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을 논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다루지만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설파하나 ‘자신의’ 쾌락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키케로는 노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신의’ 노쇠는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글을 읽다보면 그들 자신도 형이상학적 존재들 같다. 몽테뉴가 보기에 이런 유의 점잔 빼기가 ‘공상적인’ 객설을 낳는 것은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이 철학자들은 여느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지혜를 설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속임수’다.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중에서

크리스천이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성경대로’ 아닐까?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성경대로 택해야 한다. 성경대로 벌어야 한다. 성경대로 드려야 한다. 성경대로 모여야 한다. 성경대로 나눠야 한다. 성경대로 구해야 한다. 성경대로 섬겨야 한다 등. 그노무 성경대로라는 말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주문처럼.

이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또한 너무 공허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대로의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누구는 2000억짜리 건물을 짓고, 성경대로 누군가는 변변한 제 누울 곳 하나 없다. 성경대로 누구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성경대로 누군가는 곧 망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성경대로라는 말로 모든 것을 눙치거나 공상적 메시지를 싸지르지는 말자. 도리어 ‘자신의’ 성경이 무엇인지, ‘자신이’ 알고 이해한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하자. 그래서 모두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객설말고, 누군가에게는 귀히 들리고, 누군가에게는 거슬릴만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그 한계 또한 통크게 인정하자. 그래야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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