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기묘한 신학]인간의 양성에 대한 성경적 인간론 (틸리케 [성윤리학] 1부 서론)

 

헬무트 틸리케의 [성윤리학](새물결플러스)의 서론이다. 틸리케는 성윤리학을 풀어내는 글의 서론으로 본인이 이해하는 성경적 인간론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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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경적 인간론은 다음과 같은 공리를 가진다. “인간의 성별이 다르다”. 이는 인간의 근원적 질서이며 이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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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은 이 공존의 하위개념, 부차적인 개념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공존의 원형이며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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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케는 신학이 “종말 그 자체”가 되려고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본회퍼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궁극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신학은 비현실적 유토피아론이다. 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모든 것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신학은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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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구체적인 상황과 환경을 직면하고 그것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창조기사, 예수의 행적, 바울의 서신을 근거로 틸리케는 성경적 인간론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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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나 시집을 가지않는 곳으로서 하나님 나라,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두 죄인이라는 로마서 3장.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의미한다. 위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성별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틸리케는 차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방법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한다. ‘궁극적’ 차원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궁극 이전의 차원’으로서 “결혼과 성과 죄인으로서의 문제”와 철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거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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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남편이 여성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창3:16은 창조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락 이후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저주이다. 창조기사에서 타락이전, 특별히 창1:27을 보면 남녀 차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철저히 동반자이다. 같은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같은 소명을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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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결의 구도는 타락 이후의 죄인들이 극복할 세상의 모습이지 창조질서는 아니다. 창조질서에 따르면 남녀는 한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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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유대교의 성차별적 가르침들은 따를만한 것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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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행적에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성차별 문화 속에서도 남성 예수는 여성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인간관계를 맺었다. 당시 문화맥락을 고려하면 예수의 이러한 태도에는 틀림없이 저항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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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도 마찬가지다. 논란이 되는 구절은 고전11:3과 엡5:23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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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케에 따르면 고전11장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울에게 있다. 11장에는 1.영지주의적 표현과 2.본성 개념이 모호하게 버무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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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도 ‘궁극 이전’의 인간이다. 그가 유출설적 기록을 했다고해서 꼭 그렇게 해석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없다. 유출설에 따르자면 남성이 더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에 따르면 여성도 다름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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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장으로 바울은 요청한다. 여성은 머리덮개를 하고, 남성을 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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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케에 따르면 고전11장에는 논리적 비약과 모호함이 있다. 그는 이러한 부분까지 케리그마적 진술로로 보지 않는다. 영지주의스러운 내용들은 바울의 인간적인 한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를 독자에게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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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려운 점은 바울이 말하는 고전11:14의 “본성”의 의미다. 틸리케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의 “본성”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정리한다. “인간의 본래적 특성”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독이다. 이 개념을 통해서 바울은 “남성과 여성이 본래적으로 다르므로, 다르게 치장하라”고 한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아닐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동일시하고 평준화하는 내용도 아니다. 남과 여는 연합하는 존재이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다.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혁명적인 내용이라고 틸리케는 평가한다.

고린도전서 뿐만아니다. 에베소서를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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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엡5:21 ‘남자의 머리됨’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시는 방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이 ‘머리됨’은 사회학적 우월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구원을 위해 몸된 교회를 섬기는 분이다. 이 내용의 부분으로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내용도 피차 서로 복종하라는 명령안에 삽입되어 있다.(위의 그림 수정필요.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를 큰 원으로, ‘그리스도는 머리’를 작은 원으로.) 남성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섬기라는 표현이리라. 물론 그리스도의 머리됨은 몸을 구원한는 의미로서 머리이다.(비유의 한계. 완전히 일치는 어려움) 의미이해를 위해 벧전3:7의 도움을 받는다. 여성은 연약한 그릇이지만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이다. 그리스도처럼 구원을 남성이 성취하지는 못한다. 함께 은혜를 받을 존재로서 섬기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다.

남성의 머리됨은 성별에 대한 객관적 이론이 아니다. 맥락상 바울이 남성들을 향해 호소하는 내용이다. 피차 복종하라는 메시지 속에서 특별히 남성들이 여성들을 바르게 섬기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이다.(엡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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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케는 케리그마와 케리그마가 아닌 내용을 분별하기를 요청한다. 딤전2:11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인정하지 않는다면 언급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틸리케는 굳이 언급한다. 그리고 입장을 분명히 한다. 딤전2:11은 케리그마라고 볼 수 없다. 그의 성서에는 우열이 있다. 내생각엔 그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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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한다. 구속사 가운데 인간의 양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창조질서 속에서 양성은 한몸처럼 지내야 한다. 그러나 타락이후 이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훼손되었다.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한몸됨과 상호소통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구원의 질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관계를 회복하기를 요청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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