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2장 계시에 관하여 – 교의학 (H. G. 푈만)

2장 계시에 관하여

 

A. 예비 고찰

계시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것을 보이게 하다”(55)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감추어진 것을 보게 하는 어떤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언제나 계시하는 자(신), 계시의 내용(신의 뜻), 계시받는 자(인간)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곧 계시를 둘러싼 다양한 신학적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특히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계시와 관련된 주요 쟁점은 ‘배타성과 포괄성’ 문제에 그 중심이 놓여 있다.

  고대부터 계시와 관련된 다양한 입장이 공존했다. 이를테면 터툴리안은 “아테네와 예루살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아무런 공통성이 없”(57)다며 계시의 배타성을 주장했고, 순교자 유스틴은 “구원사와 세속사를 하나로”(57) 취급하며 계시의 포괄성을 긍정했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58) 특히 루터는 계시를 율법(자연적 계시)과 복음(진정한 계시)이라는 이원론적 형태로 이해했는데, 그중에서도 복음이 구원을 위한 온전한 계시임을 강조했다. 이를 입증하듯 멜랑톤은 <변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최종 이전의 말씀이지, 하나님이 친히 발언하는 복음처럼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다.”(59)

정통주의 시대 역시 루터의 경향 아래서 계시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누어 이해했다. 여기서 일반 계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연적인 것이라면, 특별 계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정통주의에 의하면 특별 계시, 곧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으로 삼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나타난다.”(60)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경향에 따라 특별 계시의 초자연적인 성격이 약화되었고, 반면에 일반 계시(자연, 철학 등)의 역할은 부각되었다.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가 특별계시의 규범으로 변하고, 점차로 특별계시는 자연계시 속으로 해체되고 자연계시에 의해 대치되었다.”(61)

관념주의 시대, 다시 말해서 신개신교주의(자유주의) 시대의 신학은 계시를 어떤 체계(정통주의)나 객관적 사실(개몽주의)보다 다분히 주관적인 경험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순수한 감정이고, 우주에 대한 직관”(62)이라 설명했다.

B. 오늘날의 논쟁

이런 계시와 관련된 오늘날의 논쟁은 다음의 네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계시는 점진적인가, 종결되었는가?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계시가 “영원히 종결되었다”(63)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시를 특별계시와 간접계시로 나눠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 immediata)는 그리스도 이전부터 구약성서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원증인들(사도들과 사도들의 제자들)의 시기와 함께 종결되었다. 오직 간접계시(revelatio specialis mediata)만이 종결되지 않은, 그리고 점진적인 계시로 이해될 수 있다.”(64)

2. 계시는 이원론적인가, 일원론적인가?

바울부터 루터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계시는 이원론적으로 설명되었다.(66) 이는 오늘날의 루터교 신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인데, 특히 엘러트는 계시가 “오직 율법과 복음의 갈등 속에서만”(65)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를 삼위일체에 근거한 일원론적인 체계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한 분이듯 계시는 일원론적이며, 하나님이 세 분이듯 계시는 삼중적인 것이다.(67)

성    부 → 성    자 → 성    령

계시자 → 계    시 → 계시됨

은    폐 → 드러냄 → 전    달

자    유 → 형    태 → 역사성

  “루터가 말한 계시의 이중 행위와 바르트가 말한 계시의 삼중 행위는 – 적어도 루터의 관점에서는 – 다음과 같이 일치될 수 있다.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진노하는 하나님은 성부로서 성자 때문에 성령을 통해 복음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다.”(68)

3. 계시는 배타적인가, 포괄적인가?

바르트, 본회퍼가 배타적 계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면, 알트하우스, 틸리히, 칼 라너, 한스 큉 등은 포괄적 계시를 지지한다.(68-69) 특히 포괄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모든 종교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중에서도 칼 라너, 한스 큉 등은 다른 종교 안에도 구원의 계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잠정적’이라거나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순화시켜 설명할 뿐이다. 한편 “신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존 힉, 니터 등의 다원주의, 상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 혹은 특별 계시로 보지 않고 많은 구원자 가운데 하나로 본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서로 간에 열린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우월성, 절대성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절대성은 대화 자체를 성립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도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5)

둘째, 열그러나 동시에 자기 종교가 구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대화와 설득은 내 것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진리를 독점하는 비관용적인 절대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입각점을 부정하는 상대주의도 역시 모든 대화의 죽음이다.”(76)

셋째, 일반 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드러내신다. 따라서 타종교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비록 다른 이름, 다른 형태를 취하더라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특별 계시와 그 ‘지향점’이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들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롬 1:19-21, 2:14 이하)는 단지 진노와 심판의 계시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계시이기도 하다.(행 14;17. 17:27-28)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계시한다.”(76)

넷째,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교회는 완전한 진리를 소유할 수도, 소유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밀한 결정 안에서, 교회의 한계를 넘어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해도 무방하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은밀한 결정 안에서 숨겨진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은총은 교회보다 더 크다.”(77)

다섯째, 일반 계시는 모호하기 때문에 언제나 특별 계시, 즉 말씀 계시를 통해 해석되고 확증되어야 한다. 이것은 타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즉, 특별 계시에 의한 자기검증은 타종교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향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일반 계시가 진정한 계시인지 아닌지는 분명한 말씀 계시 또는 특별 계시의 척도에 따라 항상 거듭 검증되어야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도 이러한 척도에 자신을 재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77)

4. 계시는 역사로서 일어나는가?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점은 오늘날의 신학에서 거의 일치된 확신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계시이해, 틸리히의 “계시의 역사’, 율법과 복음의 두 단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루터의 계시이해를 생각해 보라.”(80)

“계시는 결코 초자연적이거나 실존적인 특별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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