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상

[기묘한 생각]여러분의 신년 계획을 응원합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음 시험은 꼭 두 달 전부터 준비하리라. 보통은 두 달마다 시험이 있다. 이 말인즉슨 중간고사가 끝난 바로 내일부터 기말고사를 준비하겠다는 말이다. 입을 앙다물고 펜을 굳게 움켜쥐고는 기말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분명히 세웠다. 계획을. 그리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시험이었다.

모든 어른은 슈퍼맨이었다. 누구나 나보다 컸고, 나보다 많이 알았으며, 나보다 돈도 많았고, 나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지혜로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그들만 해졌고, 그들보다 내 가방끈이 길어졌으며, 대출이자를 갚기위해 쩔쩔매는 그들이 보였다. 더 슬픈 건 그들의 지혜라는 것이 이미 시대를 좇아가지 못한 고정관념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게 된 어느 날, 난 기쁘면서도 슬펐고,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동네 놀이터를 빙빙 돌면서 밤을 지새웠었다.

창조주가 계신다. 그러므로 피조계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죄인들이 아무리 활개 치고 다닐지라도 세상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워야 하리라. 창조주는 본인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나의 세계관이었고 신앙이었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세상은 그저 제자리를 도는 쳇바퀴처럼 보인다. 언제나 나쁜 놈들은 약한 님들을 괴롭히고, 이 폭력과 전쟁은 무한 반복한다. 문명이라는 것의 허울, 세계화라는 것의 욕망을 귀동냥으로 듣고 알게 되면서 나는 끝없이 삐뚤어진다. 역사는 회전하는 가운데 조금씩 진보하는 나사와 같다는 말도 이제는 사치 같다.

이렇게 나는 나에 대한 자신감이 곤두박질쳤고, 어른들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 깨어졌으며, 세상에 대한 그 어떤 긍정적인 희망도 품고 있지 않다. 많이 과장된 것 같긴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지경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들은 한 권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시도는 해보았으니 못한 걸로 하자. 읽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제목을 바꿔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의 저서들은 한결같이 한 가지 주제의식으로 쓰였다고 하더라.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들만큼은 사랑한다. 1967년 농담, 1984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최근 2014년 무의미의 축제.

내 삶은 이 세상에서 금세 발화되고 사라지는 하나의 작은 농담과 같아도 괜찮겠다.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가벼워서 가끔은 참기 힘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더욱이 무의미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나는 괜찮다. 무의미한 존재도 축제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난 품이 크지 않아서 그정도면 충분하다.

꽃을 꼭 피워야 할까. 무화과도 훌륭한 열매이지 않은가. 방금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무화과는 열매 속 그 자체가 꽃이란다. 나는 꽃이 아니어도 좋겠다. 이 세상에 큰 의미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도 상관없겠다. 더 많은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꽃이 되려고 아등바등 살지 않으련다. 그저 내 속에 꽃 비스름한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길게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볼품없는 난, 이걸로 족하다. 그러나 여러분의 계획은 언제나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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