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그분]

[기묘한 신학]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는 동일본질(호모우시아)에 관한 가르침을 “혁명적 정식”으로 평가하였다. “아리우스파는 단지 하나님과 비슷함을 주장하였다. 그 대신에 정통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학설을 단되하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 곧 본질에서 같다는 아타나시우스의 학설을 선언하면서 그리스도에게…혁명적인 정식을 적용하였다.” Atheismus im Christentum 1968, 230-231.

아타나시우스는 ‘동일본질’이라는 말로 예수의 신성을 설명해낸다. 혁명적인 정식이라고? 잘 모르겠다. 신앙인들에게는 혁명적일 수 있겠으나, 구도자들에게는 그저 모호하기만한 표현이다. 그래서 ‘동일본질’인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아타나시우스의 신앙고백의 동어반복으로 들리지 않는가.

아타나시우스의 위의 삼단논법도 마찬가지다. “아들은 구세주이다.”라는 전제로 삼단논법은 옳다. 그러나 전제 자체가 신앙적 표현일 뿐이라는 데에 한계가 있다. 아들을 구세주라고 치자. 위의 질문은 여기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들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인간의 아들인가?

예수가 신이라면, 인간인 척 했던 것이 되고, 예수가 인간이라면, 신인 척 했던 것이 된다. 신이라면 인간의 무지와 고통을 겪은 척했던 것이 되고, 인간이라면 스스로 대속의 능력이 있는 척했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쪽이나 저쪽을 선택할 수 없다.

인성이냐 신성이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동일본질’이라는 모호한 신앙고백적 표현으로 두가지 모두를 포섭한다. 하나이냐 셋이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신앙고백적 표현으로 두 가지 모두를 포괄한다.

신비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일테다.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라니. 난 잘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혁명적인 개념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이 더 크고 화려하게, 그 의미를 강조하면 할수록 지루하게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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