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상

[잡솔_5] 딴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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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세상 같다.

11월 14일. 종로 광화문 일대는 세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횃불, 펄럭이는 깃발, 절규하는 음성, 쫄딱 젖은 백성,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캡사이신 대포. 차벽으로 둘러쳐진 그곳의 풍경은 흡사 ‘공성전’을 방불케 할 어떤 것이었다. 이곳이 어딘가. 아내와 한가로이 주말의 데이트를 즐기던 바로 그 길목이 아닌가. 그런데 이 단란한 길 위에, 왜 한 집안의 가장이, 엄마가, 우리의 아들딸이 나와 울부짖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라는 젊은 정치인이 캐나다의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고 한다. 그는 새 내각(內閣)을 남성 15명, 여성 15명으로 구성했는데, 이렇듯 남녀의 비율을 동등하게 맞춘 것은 캐나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런 총리의 행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는 내각 출범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동등한 성비를 중요하게 고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2015년이잖아요.”

‘지금은 2015년이잖아요.’ 정말, 지금이 그 2015년인가. 이 땅을, 이 나라를 정말 2015년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권력의 장기짝이 되어버린 경찰, 보수의 대변인이 되어버린 언론, 그보다 한술 더 뜨는 괴물 같은 어버이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2015년은 아득하여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1960년의 어디쯤을, 그것이 아니라면 1972년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개선(改善)은 ‘본때’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십여 년 전, 오랜 파업 끝에 극적으로 합의를 이루어냈던 어느 노조를 보며 작가 김훈이 했던 이야기이다. 그간 많은 말을 했고 숱한 글을 썼지만, 정작 개선은 본때를 보여주는 몸부림이 이루어냈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다. 지렁이의 몸부림이, 굼벵이의 꿈틀댐이 이 공고한 체제를, 구조를,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본때를 보여줄 때에야 비로소 이 땅의 주인은 망령이 아니라, 황금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의 시위로 정권이 뒤바뀌거나, 위정자들이 정신 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체제는 오랜 세월 축적된 권력과 자본을 버무린, 아주 케케묵은 것이니까. 무력하다. 그러나 무력할지언정 무심해서는 안 될 일이다. 행동할 수 없으면 말이라도 해야 한다. 말을 할 수 없다면 글이라도 써야 한다. 글을 쓸 수 없다면 지켜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들을, 그들의 민낯을 철저히 목도하여 두 눈에 새겨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역사로 남아야 한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시위의 열기 또한 사위어간다. 분명 저 두터운 벽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집에 돌아갈 사람일 텐데, 실상은 차가운 쇠붙이로 만든 것인양 무심하기만 하다. 하루 종일 목이 터져라 부르짖은 백성은 이제 더는 소리칠 기운조차 없어 보인다. 더구나 생업, 그들에게는 다시 돌아가야 할 눈물겨운 삶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곧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밥벌이를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경찰, 아니 충실한 견찰 조직 앞에 시위는 무력했다. 여기저기서 차벽에 분풀이를 하고 의경들을 골려주었을뿐, 전체적으로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져 있는 듯 했다. 그들은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강제연행으로, 폭탄벌금으로, 앞장 선 이들을 지질러 놓을 것이다. 억압의 전신갑주를 뒤집어쓰고 길게 도열한 저 거대한 장벽에 비하면 백성은 파리처럼 우스울 뿐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각종 과일과 열매로 예배당이 환하다. 앞에는 기다란 가을 빛 현수막이 내걸렸고, 주보에는 열 가지 감사 제목을 적어보라며 카드가 들어 있다. 강단에선 무엇이 그리 고마운지 연신 감사의 인사, 감사의 노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사하면 복이 굴러들어온다는 아주 감사한 말씀.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감사한 이들. 그렇게 무르익어 가는 거룩한 시간 속에서 왠지 모르게 삭연한 기분만 몰려든다.

딴 세상 같다.

여기만 정말 딴 세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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