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구원]

[기묘한 신학]이해가 안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ㅠ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클릭하면, ‘Ask Pastor John’ 팟캐스트 에피소드 102, 영어와 한글자막 모두 포함된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존 목사님. 이것은 우리가 거의 날마다 이메일을 통해 받는 질문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정답은 완전하고 명백하고 단호하고 기쁘고 영광스러운 “아뇨”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죽은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거듭나기 전 상태로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고 여기서 성경적인 추론을 조금 하겠습니다. 단지 신학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성경 본문으로 말씀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로운 탄생에 주어진 생명은 바로 영생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11”

따라서 그분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장차 오게 될 시대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기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자, ‘영화’는 영구적인 구원의 최종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모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떨어져 나가는 사람 아무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고, 모든 의롭다하심을 입은 자들은, 떨어져 나가는 사람 아무도 없이 영화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약 ‘부르심을 입었다면’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적 범주에서 부르심을 입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다고 논증할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실패가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예를 들어,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가룟 유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명에 따르자면 이들은 애초에 부름받은 없었다고 해야할까요? 민족의 왕으로, 12명의 제자로 부르면서도 의롭다고는 부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왠지 억울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래의 6차 트리엔트 공의회는 ‘인간의 반작용’을 구원의 과정에 끼워넣습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과 실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기독교인들을 보더라도, 부르심을 입은 자도 구원을 부정한다면 잃는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목자가 끊임없이 양을 부르지만 양이 끝까지 목자를 무시한다면, 어찌 그 양을 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강제로 그 양의 목자가 되겠습니까?  – 기묘한

[참고: “교의학-푈만” 379]

제6차 트리엔트 공의회 칭의론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방면되는 순간에 구원이 주어진다는 점이 강조되지 않고, 칭의가 복합적인 사건으로서 다섯 단계를 밟는다고 설명되었다.

1.선행적 은총 2.준비 3.칭의 4.선한 행위 5.영생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1,3,5단계는 하나님의 작용이고, 2,4단계는 인간의 반작용이다. 인간의 반작용은 하나님의 작용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작용과 함께 구원을 일으킨다. 선행적 은총은 칭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인간을 준비시킨다. 칭의 은총의 본질은 사죄와 성화에 있다. 주입된 칭의는 영생을 획득하는 선한 행위를 통해 보존되고, 증가된다. 선행적 은총은 구원의 과정 전체를 활성화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인간의 반작용은 항상 선행하는 하나님의 작용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입을 것이고,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고 그것은 우리가 거듭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는 부르심의 종류는 무덤 안에 있는 나사로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나사로야! 너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자, 나와라!”

그리고 그 ‘부르심’이 그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 그 생명을 창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부르심에 어떤 ‘약속’이 첨부되어 있다는 뜻이고… 여기에 몇 개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5:23,24”

따라서 거기서의 논리는…만약 당신이 부르심을 입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당신은 마지막 날을 위해 보존될 것이라는 겁니다.

또는 여기 고린도전서 1장8절에 다시 나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과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8,9”

따라서 이제 다시 로마서 8장 30절로 돌아가서 왜…

‘모든’ 부르신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입고 ‘모든’ 의롭다하심을 입은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동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원한 보증을 예방접종처럼 생각합니다. 마치…마치 ‘내가 6살이었을 때, 나는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 내 팔에 예방접종을 하셨고, 나는 지옥의 저주라는 질병을 앓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의사와 평생의 치료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제 환자입니다. 당신은 제가 하라는 대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끝까지, 마지막 날에 온전한 상태로 이끌 것입니다.”

 

자동적인 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면서도, 부르심은 단 한 건의 실패 없이 영화롭게 된다고 하십니다. 제가 듣기에는 자동적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자동이 아니라면 강제로 들립니다.  – 기묘한

 

예레미야 32장 40절 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제 견인(굳게 인내함)에 대해 영원한 예스yes 의 고백이 되는, 제가 완전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일 겁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떠.나.지.않.게.하.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사신 새 언약은 보존의 언약입니다. 이는 그저 어떤 기계적인 방식의 보증이 아닙니다. 활동적인 방식의 보존입니다. 하나님은 제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완성시킬 것이다. 따라서 기계적 방식의 보증으로 보입니다. – 기묘한

 

토니, 제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일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물어볼 때, 많은 사람들은 약간 충격을 받습니다.

“아, 왜냐하면 음…그러니까, 마치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인 것과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아침에 그리스도인으로 일어날 텐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우실 것이고 여러분 안에서 그분의 믿음을 깨울 것입니다!

그리고 구절들 몇 개 더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 이유…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의…그를 향한 부르심, 그의 새 탄생과 연결되는 방식 때문입니다.

“능희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이 하실 이에게 유다서1:24”

제가 전에 이것에 대해 설교를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나이 67세에 제 목회 사역을 막 마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간직하셨다는 사실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간직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쓰러지고 그분의 이름에 치욕을 가져오고 교회를 파괴하도록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돌아보면서 팔짱을 끼고 “나는 참 괜찮은 녀석이군!”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놀랍다! 놀라워! 나를 간직하셨고 나를…간직하실 이에게 영광을!”

이것으로 사람들이 항상 갖고 있고 갖고 있어야 할…단 하나의 핵심 질문이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그들은 집사였거나 장로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그들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그들 중 몇 명은 그 상태로 죽습니다. 음… 그 사람들은요?”

저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깊게 생각해봐야 할 두 가지 핵심 구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는 요한일서 2장 19절 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리고 그 구절에서 ‘우리에게 속하다’는 틀림없이 ‘우리와 함께 거듭나다’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다’라는 뜻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 같아 보였고, 몇 가지 옳은 것들을 말했고, 장차 오게 될 시대의 능력을 맛보긴 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만…하나만 더. 그거 아십니까?

히브리서 6장은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인데요. 사람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도 여전히 거듭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저는 히브리서 3장 14절이 히브리서의 절대적인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것을 보면…그…그는 “만약 너희가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끝까지 견뎠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믿음 안에서의 견인(굳게 인내함)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견인이 버텨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안에’ 있었던 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신은 이것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확신은 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 주권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뿌리박은 확신이며,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십니다.

 

확신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튼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구원기계, 인간의 확신은 구원기계의 스위치라고 오해하기 쉬워보입니다. – 기묘한

 

감사합니다. 존 목사님.

그리고 이 팟캐스트를 청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desiringGod.org에서 Ask Pastor John에 메일로 저희에게 보내주세요. desiringGod.org에서 존 파이프의 기타 무료 자료 수천 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진행자 토니 레인테입니다. 청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ubtitled by Bangjamang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가 그동안 가르쳐 온 ‘이중예정’은 비복음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일군의 사람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 곧 ‘선택’으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저주와 죽음 곧 ‘버림’으로 예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어긋난다. 만일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의 선택과 버림을 예정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중예정설은 비복음적이요 비기독교적이다. – 김균진, 『현대 신학사상』,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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