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신앙]

[기묘한 신학]부단한 해체의 움직임

우리는 거룩한 말씀이 존재를 넘어서 신적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숨겨진 신성에 관해 (우리의) 말들과 개념들에 의존하여 설명해서는 안 된다 – 위 디오니시우스 [Divine Names]

어떠한 말함(부정적인 말함을 포함하는)도 이를 교정하는 명제로 취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교정의 명제는 그 이전의 명제를 취소하지만 그 자체도 반드시 나중에는 취소되어야 할 ‘말함’이 되고 만다

– 셀스(Michael Sells)

이 같은 담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두 명제들 간의 긴장이다. 이러한 긴장은 부단히 지속되는 언어적인 취소의 행위들에 의해 계속되어야 한다.

– 셀스(Michael Sells) [Mystical Languages of Unsaying]

언제든 본인의 주장을 취소할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사랑스럽더라

부정신학은 긍정적 부정성이든 부정적 부정성이든 어느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이 둘 간의 부단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안택윤 “부정 신학적 신척 초월의 포스트모던적 이해에 대한 비교 연구”

부단히 움직일 용기와 신앙이 있는가가 관건

3 replies »

  1. 중고딩 시절, 난 참 찌질했었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 대딩 시절은 조금 나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찌질하긴 마찬가지였다.

    얼마전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폐쇄가 전혀 슬프지 않았다. 존심 상 지우진 않고 남겨두었던 찌질했던 모습들. 공식적으로 지워줘서 고마웠다.

    “사진 하나 남기지 말고 탈탈 털어서 버려주라. 구글신도 찾지 못하게.”

    바라기는 ‘5년 뒤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볼 때 찌질해보였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깊고 넓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은 몸이 그런 것처럼 감성과 지성 모두 성장이 둔화된 것 같다. 아직 젊지만 벌써 상실감과 허무감이 파도처럼 오간다.

    과거의 나, 초심. 그 찌질함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나중엔 이미 떠나버려서 발자국만 남더라도, 그래서 슬프더라도, 지금 이곳에 정체되어 있지 않기를 바란다. 몸은 쪼그라들더라도 내 마음과 머리는 더 충실하길 바란다.

    너 듣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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